친정 어머님을 기리며


최 인영 권사

한참을 묵묵히 눈을 감고 기원의 환호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지듯 조용한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오면 가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하지만 부모와 자녀간에 이별의 아픈 여운은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갖게 합니다.  1987년 10월 27일은 드디어 친정어머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 즈음 우리 내외도 도미한지 6년만에 귀국하였던 때였고, 그 임종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기회 허락하신 성령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때는 1986년 9월 말 새벽 6시 뜻하지 않는 여동생 창숙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떨리는 동생의 음성, 내용인즉 어머님께서 갑자기 심장에 이상이 생기어 병환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시니 급보가 닫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88세가 되셔도 그렇게 깨끗하게 지내신 어머님이... 맑은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나 자신 안절부절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격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달래며 하나님께 매어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내게 스쳐 가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주님 예루살렘으로 어려운 발걸음을 하실 무렵 디데오의 아들 바디메오가 예수님 지나가심을 알고 매어 달려 호소하는 말 “나사렛 예수님이시여, 나를 도와주소서”하니 예수님 말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실 때 바디메오는 조금도 주저치 않고 확실한 대답을 말씀드리되, 눈뜨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말씀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신 순간 바디메오는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선 죽은 지  나흘 된 사람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전화 받는 순간 나도 주님께 애원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꼭 1년만 어머님의 생명 연장을 빕니다. 소리 높여 애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선 하시고자 하실 때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압니다. 또 생각에 잠깁니다. 지난 봄 어느 주일 저녁 예배 때 유 목사님의 설교 말씀 가운데 한 고학도의 신학생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신학생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못하게 될 무렵 기도하며 하나님께 애원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이 불쌍한 저를 도와주세요. 기도 끝에 하나님 앞으로 편지를 띄웠습니다. 겉봉은 하나님 전 상서, 내용은 사연을 자세히 적어서 띄웠습니다. 이에 당황한 사람은 우편 배달부입니다. 속수무책 하는 수 없이 생각 끝에 어느 큰 교회에 전달했더니 그 교회 당회장님 당회를 거쳐 즉시로 등록금 전달하였고, 졸업 후 그 고학생은 유명한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계속 어머님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나님 전 상서의 편지를 띄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겉봉은 어머님 주소로 내용은 하나님 전 상서로 찬송가와 성경구절 그 날의 하나님께 향한 기도까지 충심을 다해 써서 우송하기로 결심. 즉시 남편에게 부탁하여 어머님께 관한 카드 구해주기를 간청하여 100장의 카드를 사주기를 쾌히 승낙 받았습니다.

남편의 지극한 협조와 정성 매일 같이 넉 장, 다섯 장에 제일 아름다운 카드는 준비되어 갑니다. 카드를 띄운 후 두 달이 가까웠을 때 어머님의 친필의 편지가 도착되었습니다. 어머님의 달필의 붓글씨가 삐뚤삐뚤 엉망입니다. 내용인 즉 너희들의 기도의 카드는 너의 형제들은 물론 방문객 교인들 다같이 보며 목사님들까지 그대로 예배드려 주시며 기뻐 하신다고요. 벽에 부친 카드가 차고 넘친다고요. 이젠 이만큼 차도가 있으니 그만 그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이기에 기어이 100장을 이행했습니다.
그 후로는 어머님의 음성까지도 전화를 통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요사이는 도시락 싸 가지고(어머님 식성에 맞는 초밥, 소금과 참기름 버무린 흰밥에 김으로 둘둘만 김밥, 아버님 입맛에는 도저히 맞지 않으시나 어머님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맛있다고 잡수심) 근처 공원 벤치에 앉으시어 잡수시고 가끔 산책도 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빼 놓은 5남매 자손들 돌려가며 돌봐드리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다음 해 9월 웬일인지 참고 참았던 부모님, 형제들이 그리워 남편과 큰아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선한 가을보다 봄에 가시는 것이 어떻시겠느냐고 합니다. 내 주장을 안 하는 내 성격에 처음으로 한사코 우겨 10월 3일자로 한국에 닿았습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나 할까 마침 추석날인지라 형제들, 친척들이 어머님 댁에 다 모인 때였습니다. 그립던 식구들 전부를 반갑게 만날 수 있었고 수척하셨지만 깨끗해지신 어머님의 밝은 모습도 뵈올 수가 있었습니다. 서로가 지난날의 보고에 분주했습니다. 그간 올케들과 여동생 내외 그리고 자손들의 효도와 수고는 이루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약 20여 일을 지난 26일 어머님께서 여동생에게 물으시더랍니다. 너희형이 달 말에 떠난다지? 그날 아버님 말씀 전하시기를(전화로 통화) 너희 어머님 깨끗이 소세하시고 저녁 진지 콩 진지와 콩나물국 시원히 드시고 잠드셨으니 내일은 투표 끝내고(대통령 선거 날) 너희들 밀린 일하고 모레 만나자고 하십니다. 우리도 너무나 할 일이 밀렸습니다. 남선교회 친구들 찾으랴, 목사님께 작별 인사드리랴, 친척들 찾아뵈랴. 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동생들도 둘째는 그 큰 회사 사장으로 일이 밀리고, 셋째 의사 동생은 그 즐기는 바다 낚시에, 여동생도 밀린 일 하느라 모두가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마음이 편치 않더랍니다. 급기야(及其也) 정오가 되니 아버님의 조급하신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너희 어머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셨으니 모두 모이라고요.
나는 쇼핑까지 해야 되고, 시댁 식구들 찾아봬야 되고, 겨우 오후 4시가 되어 전화 연락하니, 어머님 위중하시어 온 식구가 모였다고요. 너무 당황치 말고 오라고 하십니다. 놀란 나머지 택시 잡아타고 겨우 당도하니 의사 동생 우리에게 마지막 운명하심 보여주려고 주사로 계속 연명시켜드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온 가족 모여 조용한 찬송과 기도 가운데 오후 9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아버님 손과 둘째 아드님의 손잡으시고 고요히 미소 띄운 편안한 얼굴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의 극진한 사랑 가운데 72년이란 긴 세월 복 되게 해로(偕老)하시다가 아버님께 먼저 가서 죄송하다는 눈빛을 보내시며 떠나셨습니다.  아버님, 아드님들, 훌륭히 사신 연고로 여섯 교회 목사님, 교인들 모인 가운데 입관식 받으시고 그 많은 화환 40여개나 되는(1개당 15만원 상당이라 함) 호화스런 장례식은 본 교회인 정동 제일감리교회서 5일장으로 치르셨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하염없는 눈물 멈출 길 없고 남편의 마음 더 괴롭힐까봐 오랫동안 눈감고 묵상에 잠겼습니다. 제가 100일 기도 드린 꼭 일년만에 꽁꽁 묶고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강한 손은 우리 최씨 가문에 믿음의 버팀목이신 어머님을 데려 가셨습니다. 우리가 말리고 붙들기에는 도저히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더 연장의 기도를 드렸을 것을,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께 계속 드리는 기도는 어머님의 영을 위해 부탁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곁들여 홀로 남으신 아버님과 유가족들을 위로하여 주십사고요. 비행기 밖에는 어머님의 소천하심을 애도나 하는 듯 때아닌 부슬비가 한없이 나려 나의 마음을 적시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