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에 새겨진 도덕법의 존재에 관한 장!

[로마서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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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Mother Teresa vs. Hitler (p169-193)

전제 1: 모든 법은 입법자가 있다.
전제 2: 도덕법이 존재한다.
결론: 따라서 도덕법의 입법자도 존재한다.

첫 번째 전제는 참이다. 두 번째 전제도 참인가?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랑은 미움보다 우월하며, 용기는 비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안다. CS Lewis의 표현에 따르면, 전쟁에서 도망치는 병사를 존중하는 사회, 혹은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을 배신한 사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회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 사회보다는 2+2=5가 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누구나 절대적인 도덕적 의무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우리는 도덕법을 발견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냥 안다. 절대적인 도덕법은 절대적인 도덕법 입법자가 존재함을 함축한다. \“Natural Law is self evident” .

1. 우리는 도덕법이 존재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도덕법은 부정할 수 없다.
상대론자들의 대표적 주장은: 첫째,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둘째, 절대적인 도덕 가치도 없다. 당연히 첫번째, 주장은 자기파괴적 self defeating명제이므로 거짓이다. 상대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 ‘never, perfect, always, absolutely’의 사용을 피한다. 물론 이것도 self defeating 주장이다
--> One should never say ‘Never’.
-->‘We should always avoid using the word ‘Always’ ”.

(2) 우리 자신의 반응에 의해 알 수 있다.
스스로 상대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배우자가 성적 상대주의자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남자 상대주의자들은 적어도 자신의 부인은 성적 타락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인 것처럼 여기며 살기를 기대하며, 만약 그녀가 문란한 생활을 범하면서 상대주의를 실행하면 정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나의 반응 (기대)을 통해서도 절대적인 도덕법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3) 도덕법은 인권의 기초이다.
도덕법이 없다면, 히틀러를 비난할 근거가 없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알 수 없다면 나찌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나찌가 절대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도덕법은 존재한다.

(4) 도덕법은 정의Justice의 변하지 않는 기준이다.
도덕법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불의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직선’이 무엇인 지 모른다면 곡선이 무엇인지도 말할 수 없다. 내가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때 나는 도대체 무엇과 비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마음에, 선에 대한 변하지 않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의를 탐지할 수 없다. 선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면 악에 대한 어떠한 객관성도 개인적 의견일 뿐이다. 다시말해, 만약 도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악이나 불의도 감지할 수 없다. 정의가 없다면, 불의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무엇이 악한 일인지 알고 있다. 따라서 도덕법은 존재한다.

(5) 도덕법은 도덕적 위치 간의 차이를 정의한다 (테레사 수녀와 히틀러)
세 종류의 영국 지도가 있다고 할 때, 어느 지도가 더 정확한 지도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짜 영국 지도를 알 때이다. 히틀러와 마더 테레사의 행동을 비교할 때 그 기준은 도덕법이 된다. 만약 도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둘 중 누구의 행동이 더 나은 지 말 할 수 없다.

(6) 도덕법은 정치적 사회적 견해 차이에 대한 기반이다.
도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이슈에 대한 어떤 입장이 객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입장이 없다. 도덕법이 없다면 동성애자 학대나 인종차별, 낙태금지 등이 나쁘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다시 말해, 도덕법이 없다면, 무신론자들은 그들의 정치적인 이슈들을 논쟁할 도덕적 기반을 잃게 된다. 무신론의 세상에서는 권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동성애나 낙태 등을 행할 ‘권리’ 도 없어진다. 무신론자의 도덕적 입장은 주관적 선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므로, 아무도 도덕적 강제 아래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생명과 자유에 관련된 이슈들은 단순한 주관적 선호 이상인 것을 안다.

(7) 만약 도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도덕법을 위반한 것에 대해 변명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비도덕적 행동에 대해 변명하는 것은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무언의 인정이다.

2. 정말 절대적인 도덕법이 존재한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도덕에 대해 혼란이 있는가?
(1) 도덕은 절대적이나 행동은 변한다. 사람들의 행동은 변하지만,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2) 도덕은 절대적이나 사람들이 사실을 인지하는 능력은 변한다. 중세 마녀는 사형에 처해졌으나 지금은 아니다. 현재의 도덕이 더 이상 마녀를 죽이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변한 것은 도덕법이 아니라 사실의 인지이다.
(3) 도덕은 절대적이나 적용되는 상황들은 특별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나쁘게 행동했을 때보다 어떤 나쁜 행동의 희생양이었을 때, 그 행동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도덕적 딜레마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종종 도덕이 상대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도덕이 상대적이라면 딜레마 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딜레마의 발생은 도덕인 절대적임을 증명한다. 우리가 딜레마와 함께 분투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이 옳고 가치 있는 것인 지 알기 때문이다. 윤리학에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도덕법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자연 법칙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한다고 해서 객관적인 자연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답하기 어려운 도덕적 상황에 직면한다고 해서, 도덕법이 존재함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4) 도덕은 절대적이지만 문화는 상대적이다. 인사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마다 다르다.
(5) 도덕은 절대적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한다. 예를 들어 낙태논쟁의 경우, 한 쪽은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인지 아닌 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대상을 총으로 겨누고 있다면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총을 쏘아서는 안된다. 즉, 생명의 시작이 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면 (동의되지 않는다면) 낙태를 해서는 안된다. 다시말해, 낙태논쟁과 같은 것은 도덕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음에서 초래된 것이다.
(6) 도덕적 상대론자들은 종종 목적을 수단과 혼동한다. 예를 들면, 군인과 평화론자 모두 궁극적으로 평화를 원하나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은 다르다

3. 그러면, 진화론자들은 도덕법에 대해 뭐라 말하는가?
사실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이 주제를 외면한다. 그러나 진화론자 에드워드 윌슨은 정말 예외다. 그는 우리의 도덕 감각은 우리가 진화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연 선택에 의해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 의하면 도덕은 물질적으로 그리고 유전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1) 물질에, 그리고 유전에 도덕의 책임이 있다면, 히틀러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는 단지 나쁜 화학 분자를 가진 것 뿐이다. 그것은 난센스다. 도덕은 자연선택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2) 윌슨은 도덕이 갖는 ‘cooperative’ 특징들이 인간의 생존을 함께 돕기 때문에 진화되었다고 말하지만, 진화론자들은 사람들이 왜 자기 파괴적인 행동에 관여하는 지 설명할 수 없다 (흡연, 음주, 마약, 자살 등). 혹은 자신의 생존 본능을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전복시키는 지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거기에는 단순히 생존보다는 좀 더 고귀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안다.
(3) 진화론자들은 ‘생존’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도덕법이 없다면 정말 좋은 것 같은 것은 없다.
(4) 진화론자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도덕법을 아는가”를 \“도덕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와 혼동한다. 진화론자 앤킨스는 도덕은 유전자와 뇌를 통해 진화해 온 것이라 주장했다. 맞다고 치자. 그래도 도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정말, 수학적 능력과 구구단표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학의 법칙들은 나의 배움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 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5) 진화론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진화된 도덕 감각에 우리가 왜 순종해야 하는 지 설명할 수 없다. 강간하면 왜 안되고, 도둑질하면 왜 안 되는가? 강자가 약자를 탈취하면 생존에 더 유리함에도, 강자는 왜 그 약자와 협력해야 하는가?

4. Ideas have consequences
히틀러는 자신의 유태인 대학살을 철학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윈주의에 의존했다. 그의 요점은 열등 민족과 우등 민족이 존재하며, 열등한 민족은 존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인종주의와 대량학살은 다윈주의의 논리적인 귀결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진화론자인 피터 싱어 교수는 수정된 지 28일 이하인 태아는 죽여도 된다고 믿었다. 그의 믿음은 진화론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왜 28일로 제한하는가이다. 28개월 혹은 28년이면 왜 안되는가? 도덕법이 없다면 몇 살에 죽이든 그건 정말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진화론자들은 그러한 결론을 거부할 것이나, 그러한 거부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최근 두 명의 진화론자가 강간이 진화의 자연적 결론임을 주장하는 책을 썼다. 진화론의 세계는 도덕의 입법자를 미리 배제한다. \“일관성있는” 진화론자들에게는 살인과 강간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혐오하기 때문에 살인과 강간이 반대된다.

무신론자들은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기초가 없다. 이는 무신론자들이 비도덕적이라거나 그들이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정당화할 방법이 없을 뿐이다. 도덕의 절대적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도덕적 이슈들은 개인적 선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CS 루이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정말 이상한 생각, 즉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말 없앨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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