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좀 깁니다. (치느라 오래걸렸습니다.)

그런데 꼭꼭 씹어 읽어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읽던 책에서 너무너무너무 다가오는.. 부분을 옮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변화되기 원하신다는거..

그리고 그렇게 살려 노력했던 한사람..

우리가 많이 듣고 아는 성경의 위인들..(하나님이 택하신 멋진 사도바울.. 사자굴에서도 용감했던 다니엘.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 ) 이 아닌.. 우리보다 겨우 한세대 앞서 살아간 사람의 일기..

여러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나요?

불가능해 보여도 시도하고 싶지 않나요?

천국가서 경험할 교제의 깊이를, 지금 살고있는 이곳에서 누리고 싶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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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루카도의 '예수님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믿음이 커지면 하나님의 사랑도 더 커질줄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묵상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사랑도 더 깊어질줄 생각한다면 그 또한 오해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과 혼동하지 말라. 잘할때는 후해졌다 실수하면 줄어드는 것이 사람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내 딸이 걸음마쟁이 였을 때 나는 딸아이를 우리 아파트에서 가까운 공원에 데리고 가곤했다. 하루는 딸아이가 모래에서 놀고 있는데 아이스크림 장사가 왔다. 하나 사서 주려고 돌아서니 딸의 입안이 온통 모래였다. 내가 맛있는 걸 넣어주려던 곳에 딸아이는 흙을 잔뜩 넣었던 것이다.

입안에 흙을 넣은 딸아이를 사랑했을까? 두말하면 잔소리. 입안에 흙이 있다고 딸의 자격에 미달했을까? 말도안된다. 입안에 흙을 물고 있도록 계속 그대로 두었을까? 천만의 말씀. 나는 딸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대로 둘수는 없었다. 음료수대로 안고가 입을 씻어주었다. 왜?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에게 똑같이 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샘으로 안고가신다. “얘야, 흙을 뱉어라.” 우리 아버지는 타이르신다. “ 나한테 더 좋은게 있단다.” 그렇게 그분은 우리의 오물을 씻어주신다. 부도덕, 부정직, 편견, 원한, 탐욕을. 우리는 씻는 게 즐겁지 않다. 심지어 어떤 때는 아이스크림 대신 흙을 택하기도 한다. “내가 먹고 싶으면 흙도 먹을수 있어!” 입을 내밀며 큰소리 친다. 맞는 말이다. 우린 그럴자유가 있다. 그러나 흙을 먹으면 우리만 손해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들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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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에서 우리는 날마다 시간을 떼어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일의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개념을 한걸음 더 깊이 발전시켜 보자. 아주 큰 보폭의 한 걸음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아예 끝이 없다면? 하나님의 임재안에 - 순간의 단위로 - 사는 것은 가능할까? 그런 친밀함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런 의문으로 씨름하던 한 사람은 이런 글을 남겼다.

하나님과 그런 교류를 항상 유지할 수 있을까? 깨어있는 동안 내내 그렇게 살다 잠들때 그분 품안에 잠들고 다시 깰때 그 분의 임재안에 깰 수 있을까? 그 임재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항상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을까? 항상 그분의 생각으로 생각할수 있을까?... 하나님이 언제나 내 마음에 거하실 수 있도록 내 생각의 흐름속에 시시각각 주님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을까? 내 남은 인생을 이 질문의 답을 찾는 실험으로 삼으리라.

Frank Laubach의 일기에 나오는 말이다. 1884년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문맹자들의 선교사가 되어 그들이 성경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도록 글을 깨우쳐 주었다. 그러나 이사람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교육 사역이 아니다. 그의 듣는 귀가 나를 매료한다. 자신의 신앙 생활에 만족을 못 느끼던 로바크는 45세 나이에 이런 결심을 한다. “하나님과 내적 대화를 쉬지않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반응하며” 살기로 한것이다.

1930년 1월 30일자로 시작하여 그는 자신의 실험을 일기에 적었다. 여기 중요한 대목을 몇군데 소개한다. 읽을 떄 염두에 둘 것은, 이것이 수도원의 수사가 쓴 글이 아니라 열심히 바쁘게 살던 한 교사가 쓴 글이라는 사실이다. 19970년 세상을 떠날때쯤 로바크와 그의 교육방법은 거의 전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널리 존경받았고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가 마음에 열망한 것은 세간의 인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와의 끊어지지 않는 교제였다.

1/26/1930 매순간 하나님을 느끼고 있다. 의지의 행동이다. 지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이손가락도 하나님이 인도해주시기 바란다. 내가 걷는 걸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흘러나오기 바란다.

3/1/1930 보이지 않는 한 손이 내 손을 잡아 이끄시고 또 다른 손이 앞에서 내 길을 예비하신다는 이 의식이 내안에서 날마다 자라가고 있다.. 그 의식이 살아나는데 이른아침 오랜시간이 걸릴때도 있다. 그 의식이 살아나 주님이 분명히 느껴질 때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다.

4/18/1930 하나님과의 교제의 참맛을 느끼자 그분께 합당치 않은 모든일들이 역겹게 느껴졌다. 오늘 오후 하나님의 임재의식에 강하게 붙들리면서 말할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전에는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이 어찌나 가깝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놀랍게 차오르던지 마치 낯선 지복의 만족감 속에 나 자신이 온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경험은 이제 한주에 여러 번씩 찾아온다. 이것을 경험하고나자 모든 더러운것들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 위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한 시간정도 나누고 나면 나의 영혼이 막 떨어져 내린 눈송이마냥 깨끗해 진 기분이다.

5/14/1930 매순간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을 내 생각의 주제삼고 내 대화의 짝 삼는 것, 이거야말로 평생 접해보지 못한 가장 놀라운 일이다. 점점 된다. 물론 아직은 한나절도 못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루종일 그렇게 될날이 있을줄 믿는다. 사고에 새로운 습관을 기르는 일이다.

5/24/1930 하나님께 집중하는 마음은 갈수록 강해지는 반면 다른 모든 것은 더 이상 내게 집요한 힘을 잃어버렸다. 사고가 더 명료해졌고 망각하는 일도 많이 줄었다. 전에는 힘들게 하던 일이 지금은 별다른 노력없이 쉽게 잘된다. 요즘은 걱정이 전혀 없고 잠도 잘잔다. 거의 온종일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 거울을 봐도 내 눈빛과 얼굴에 새로운 광채가 있다. 어떤 일에도 더 이상 조급한 마음이 없다. 모든일이 잘된다. 매순간을 그저 중요하지 않은 시간처럼 침착하게 맞이한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놓치는 것, 그 한가지만 빼고는 아무것도 잘못될수 없다.

6/1/1930 오, 하나님. 주님만이 저를 이해하실수 있고 주님만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걸 깨닫고 나니 주님과 저 사이가 얼마나 더 가까워졌는지요! 하나님, 하나님은 더 이상 낯선분이 아닙니다! 온 우주에서 주님은 단 한부분도 낯선데가 없는 유일한 분입니다! 주님은 온전히 제 안에 계십니다. 여기에… 오늘밤도 내일도 저는 어느때보다 더 씨름할것입니다. 단 한순간도 주님을 놓치지 않기위해. 한시간만 주님을 놓쳐도 모든 것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저를 향한 주님의 이 일은 주님이 저를 항상 온전히 지배하고 계실 때에만 이루어질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하루를 온전히 지속적으로 드린다는 면에서 지난 월요일은 오늘까지의 내 인생에서 더할 나위없는 성공의 날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사람들을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바라보니 그들의 시선과 행동도 마치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싶은 사람들처럼 바뀌었다. 예수님이 날마다 하나님과 끝없는 영적 교제로 광채를 발하며 “하나님께 취하여” 이 땅을 사실 때 맛보신 그 놀라운 위력을 나도 하루나마 약간 느낄 수 있었다.

로바크의 모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의 질문에 당신은 어떻게 답하겠는가? 하나님과 그런교류를 항상 유지할수 있을까? 깨어있는 동안 내내 그렇게 살다 잠들 때 그분 품안에 잠들고 다시 깰 때 그분의 임재 안에 깰수 있을까? 그 임재에 도달할수 있을까?

이것은 과연 현실성있는 목표인가? 도달할수 있는것인까? 혹 당신은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한다는 개념이 다소 광적이며 극단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가? 로바크의 모험을 어떻게 보든, 예수님이 하나님과 막힘없는 교제를 누렸다는 그의 말에는 당신도 동의하지 않을수 없다. 예수님처럼 되기 원한다면 당신과 나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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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것입니다.

시편27:4